야담, 야설, 고전 211

“빨간 모과? 모과가 빨갛다?

동지섣달 짧은 해가 오늘따라 왜 이리 긴가. 어둠살이 사방 천지를 시커멓게 내리덮자 마침내 신 서방이 열네 살 맏딸을 데리고 맹 참봉 사랑방을 찾았다. 희미한 호롱불 아래서 신 서방은 말없이 한숨만 쉬고, 맹 참봉은 뻐끔뻐끔 연초만 태우고, 신 서방 딸 분이는 방구석에 돌아앉아 눈물만 쏟는다. “참봉 어른, 잘 부탁드립니다. 어린 것이 아직 철이 없어서….” 맹 참봉 사랑방을 나온 신 서방은 주막집에 가서 정신을 잃도록 술을 퍼마셨다. 이튿날, 해가 중천에 올랐을 때 신 서방은 술이 덜 깬 걸음으로 맹 참봉을 찾아갔다. “참봉 어른, 약조하신 땅문서를 받으러 왔습니다. ” 맹 참봉이 다락에서 땅문서를 꺼내 신 서방에게 건넸다. 노끈을 풀어 땅문서를 보던 신 서방이 “다섯 마지기밖에 안 되네요. 나머지 다..

부친의 노망 고치기(止父妄談)

부친의 노망 고치기(止父妄談) 한 시골에 아들을 아홉 둔 노인이 살았다. 이 노인은 옛날 서당에서 글공부를 할 때 사략(史略)을 읽어서 중국 역사에 대해 조금 알고 있었다. 즉 중국 고대에는 온 천하를 다스리는 천자(天子)에, 전국을 9주(九州)로 나누어 그 책임자인 장(長)을 임명해 다스렸던 역사를 배웠던 것이다. 그래서 노인은 이 아홉 명의 아들을 두고, 늘 머릿속에 이들이 장차 9주의 장이 될 것을 상상하며 길렀다. 세월이 흘러 아들들은 모두 성장해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노인은 어느덧 나이가 들어 기력이 쇠약해졌다. 곧 노인은 의식이 희미해지면서, 옛날에 골똘히 생각하던 그 상상만 머릿속에 남게 되었다. 그리고 나아가서 아들들이 9주의 장이 되었을 때 자신은 천자, 곧 황제가 된다는 망상을 놓지 ..

색시가 화냥질하다

색시가 화냥질하다 옛날에 한 영감탱이가 논두렁길을 가고있는데 큰 암구렁이가 조그만 가물치하고 떡방아(교미)를 찧고 있었다. 영감이 이걸 보고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제 짝이 있는 법인데 큰 놈이 작은 놈하고 간식을 처먹는 것은 아무래도 도리에 어긋난 일 같아서 긴 담뱃대로 구렁이의 눈퉁이를 내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구렁이는 제 집에 가서 서방한테 이르기를 내가 논두렁을 어슬렁거리는데 어떤 영감탱이가 지나가다가 담뱃대로 내 눈텡이를 내리쳐서 이렇게 눈텡이가 밤탱이가 됐다고 고자질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숫구렁이가 아내의 원수를 갚아 주겠다고 암구렁이를 앞세우고 영감의 집으로 갔다. 그때 마침 영감은 마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난 오늘 낮에 별난 거를 다 봤어. 큰 암구렁이하고 작은 가물..

과부와 땡중

과부와 땡중 고려말의 탁발스님 선탄은 문장에 능숙하고 익살스러웠지요. 그런 까닭에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긴 했으나 계율을 지키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땡중이었어요. 이 땡중이 어느 날 암자에서 홀로 해탈을 꿈꾸며 정진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웃동네에 사는 젊은 과부가 남편이 죽은 지 3년이 되었다고 천도제(薦度祭)를 지내러 소복차림으로 찾아 왔어요. 평소 많은 한량들과 염문을 뿌린다는 바람난 과부 였지. 이게 왠 떡이냐 !! 땡중은 기쁘기 한량 없었지요. 하루종일 신성한 법당에서 지방을 붙이고 분향을 하고 지극정성으로 예불을 하며 천도제를 지내다 보니 날이 저물었지요. 할 수 없이 과부는 산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어요. 이윽고 휘엉청 달이 밝은 산사에도 고적함이 밀려 왔지요. 평소 여성 편..

과부와 땡중

과부와 땡중 고려말의 탁발스님 선탄은 문장에 능숙하고 익살스러웠지요. 그런 까닭에 세상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긴 했으나 계율을 지키지 않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땡중이었어요. 이 땡중이 어느 날 암자에서 홀로 해탈을 꿈꾸며 정진을 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이웃동네에 사는 젊은 과부가 남편이 죽은 지 3년이 되었다고 천도제(薦度祭)를 지내러 소복차림으로 찾아 왔어요. 평소 많은 한량들과 염문을 뿌린다는 바람난 과부 였지. 이게 왠 떡이냐 !! 땡중은 기쁘기 한량 없었지요. 하루종일 신성한 법당에서 지방을 붙이고 분향을 하고 지극정성으로 예불을 하며 천도제를 지내다 보니 날이 저물었지요. 할 수 없이 과부는 산사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어요. 이윽고 휘엉청 달이 밝은 산사에도 고적함이 밀려 왔지요. 평소 여성 편..

말이란 양쪽 말을 다 들어봐야

옛날에 한 영감탱이가 논두렁길을 가고있는데 큰 암구렁이가 조그만 가물치하고 떡방아(교미)를 찧고 있었다. 영감이 이걸 보고 아무리 미물이라 해도 제 짝이 있는 법인데 큰 놈이 작은 놈하고 간식을 처먹는 것은 아무래도 도리에 어긋난 일 같아서 긴 담뱃대로 구렁이의 눈퉁이를 내리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구렁이는 제 집에 가서 서방한테 이르기를 내가 논두렁을 어슬렁거리는데 어떤 영감탱이가 지나가다가 담뱃대로 내 눈텡이를 내리쳐서 이렇게 눈텡이가 밤탱이가 됐다고 고자질을 했다. 이 말을 들은 숫구렁이가 아내의 원수를 갚아 주겠다고 암구렁이를 앞세우고 영감의 집으로 갔다. 그때 마침 영감은 마을 사람들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난 오늘 낮에 별난 거를 다 봤어. 큰 암구렁이하고 작은 가물치가 떡방아를 찧고..

신관 사또가 부임했다

신관 사또가 부임했다. 훤한 신수에 긴 수염, 꽉 다문 입에 위엄이 서렸다. 지방 토호들이 환영 연회를 옥류정에서 질펀하게 열었다. 열대여섯살 동기들도 있었는데 사또는 굳이 기생들이 이모라 부르는 옥류정 여주인을 수청 기생으로 지명했다. “사또 나으리, 쇤네는 나으리를 모실 자격이 없습니다. 어리고 예쁜 아이들이 수두룩한데 이 늙은 쇤네를 부르시는 것은 쇤네를 놀리시는 거지요.” 사또는 막무가내였다. 사실 옥류정 여주인은 나이가 서른하나로, 이팔청춘은 아니지만 우아한 자태에 지적인 얼굴이라 한량들이 한번쯤 품어보고 싶어했다. 하지만 여주인은 신랑도 없으면서 한번도 몸을 허락한 적이 없었다. 허나 어느 명이라고 거절하랴. 그날 밤, 주연을 파하고 안방에 들어가 사또는 이모 배 위에 객고를 풀었다. 그 뒤로..

하수댁에게 세번째 며느리

하수댁에게 세번째 며느리가 들어왔다. 첫째 며느리를 쫓아내고 둘째 며느리도 들들 볶아 쫓아낸 시어머니는 또 팔을 걷어붙였다. 한번 쫓아낼 때 힘들었지 두번째는 어렵지 않았고 새로 들어온 셋째도 보아하니 기가 보드라워 보여 콧방귀를 뀌었다. 유복자 외아들을 금이야 옥이야 키워서 며느리랍시고 들어온 년한테 빼앗길 수는 없는 법! 찢어지게 가난한 오씨네 집에 매파가 들락거릴 때 부모들은 반대했지만 첫째딸 순덕이는 보릿고개 걱정 없는 하수댁네에 세번째 며느리로 들어가겠다고 했다. 열여덟살 순덕이는 이날 이때껏 부모 말 안 따른 적이 없고 누구하고도 말다툼 한번 한 적 없는 순둥이라, 그 억센 하수댁에게 시달려 한달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어미가 말렸지만 생전 처음으로 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시집간 순덕이는 입..

황참봉이 엉엉운 사연

황참봉이 엉엉운 사연 황참봉이 비단 마고자를 입고 뒷짐진 손에 장죽을 들고 집을 나서면 마주치는 사람마다 황참봉에게 절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어르신 행차하셨습니까?” “음.” 서당 다녀오는 아이들도 코가 땅에 닿을 만큼 허리를 굽혀 “참봉할아버지 만수무강하십시오.” 하고 인사를 했고, 물동이를 인 아낙들도 물동이를 땅에 내려놓고 “어르신 안녕하십니까?” 하고 허리를 굽혔다. 심지어 황참봉의 연배들도 허리 숙여 인사했다. 불룩 나온 배를 뒤뚱거리며 저잣거리를 걸어가도 황참봉은 인사받기에 바쁘다. 황참봉은 이 고을 사람 모두가 자신을 우러러 보는 게 흡족해서 때때로 이 골목 저 거리를 돌아다닌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세차게 내리던 밤, 삿갓을 눌러쓰고 둑길을 걸어 집으로 가던 황참봉은 그만 발이 미끄러..

젊은 여인의 재치

야설-젊은 여인의 재치 과거에 낙방하고 말을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박도령은 한숨을 쉬는 대신 휘파람을 불어댔다. 처음 본 과거 시험이었고 조금만 더 공부를 하면 내년엔 거뜬히 붙을 것 같은데다 천성이 원래 낙천적이다. 꽃피고 새우는 춘삼월 호시절에 산들바람은 목덜미를 간질러 대고 만산에는 진달래가 붉게 타오르며 나비는 청산 가자 너울너울 춤을 추었다. 게으른 숫말은 책찍질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걸음을 재촉했다. 산허리를 돌자 박도령은 고개 끄덕이며 빙긋이 웃었다. 엉덩이가 빵빵한 암말이 꼬리를 흔들며 앞서 가고 있었다. 암말 위에는 초로의 영감님이 첩인 듯한 젊은 여인을 뒤에서 껴안은 채 산천경개 구경하며 한가로이 가고 있었다. 박도령의 숫말이 재바른 걸음으로 암말 사타구니 가까이 코를 벌름거리며 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