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211

어머니와 국숫집 하는 함박이

어머니와 국숫집 하는 함박이한 사내에게 칼 한자루 사는데…만추의 밤비는 을씨년스럽다.흐트러진 낙엽을 때리는 굵은 빗줄기는 ‘투두두둑’ 콩 타작하는 소리를 냈다.국숫집 함박이는 호박죽을 끓이다 말고 시시때때로 들창을 열고 빗줄기를 가늠했다.초상집에 가신 엄니가 언제 오시려나 걱정하고 있는데 대청마루에 걸어둔초롱불이 꺼지고 소리 없이 부엌문이 열렸다.“엄니” 함박이가 고개를 돌렸다. 문을 꽉 채운 시커먼 물체,그리고 가느다란 불빛을 모두 빨아들이며 번쩍이는 칼.“누구세요? 칼 장수예요?” 대답이 없다.“비를 맞았군요. 여기 아궁이 앞에 앉으세요.”함박이가 조용히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 남자의 손에서 칼을 받아 쥐고도마 위 파를 썰었다.“너무 좋네요. 손잡이가 내 손에 꼭 맞고 칼날도 마음에 쏙 드네요.안 그..

오른손 세 손가락 없는 개평꾼 노 서방

오른손 세 손가락 없는 개평꾼 노 서방묵집 과부가 준 전대 들고 노름판에…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합강나루 주막에 어둠살이 내리면 저녁상을 물린장돌뱅이들은 곰방대를 두드리고 연신 들창을 열어보며 심란해진다.빗줄기로 봐선 밤새 비가 그칠 기미가 없다. 내일이 장날인데.이경이 되자 여기저기 어울렸던 술판도 시들해지고 뒤꼍 구석에 처박힌객방이 아연 반짝이는 눈빛들로 술렁거린다.“자∼ 내일 장은 종쳤고 운발이나 대 보자구.” 항상 시동을 거는 건 소장수 곽대룡이다.벽을 등지고 쪼그려 앉은 개평꾼 노 서방이 슬며시 일어나 문밖으로 나가더니도롱이를 쓰고 주막 삽짝을 나서 빗속을 걸어가 막 문을 닫으려는장터가의 묵집으로 들어갔다.묵집 과부와 개평꾼은 초면이 아니다.노름판이 무르익어 삼경이 되면 노름꾼들은 밤참으로 묵..

나쁜 마음 품다 혀 잘린 젊은이

나쁜 마음 품다 혀 잘린 젊은이부친 세상 떠나고 외톨이 되는데밤이 깊어 풀벌레 소리만 요란한데 허 의원댁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쾅쾅쾅’ 행랑채에서 자고 있던 사동이 눈을 비비며“누구세요? 누구세요?” 고함을 쳐도“어어어∼” 말도 못하며 대문만 쾅쾅 찼다.사동이 대문을 열자 두손으로 피투성이가 된 입을 감싼 젊은이가“어어어∼ 어버버∼” 벙어리 외침만 토했다.사동이 보아하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고 돌려보낼 처지가 아니다.사동이 신발을 챙겨 신고 대문 밖으로 줄달음을 쳤다.그날따라 허 의원은 첩 집에 간 것이다.얼마나 기다렸나. 발을 동동 구르며 피를 쏟던 젊은이가 대문간에 주저앉아웅크리고 있는데 허 의원이 동산만 한 배를 안고 뒤뚱거리며 사동을 따라왔다.진찰실에 불을 켜고 응급환자를 봤더니 ..

조선조 18대 현종 임금 때 ....

조선조 18대 현종 임금 때 ....어머니의 참된 사랑조선조 18대 현종 임금 때 호조판서 김좌명(金佐明) 댁에는집안 살림을 도맡아 관리하는 똑똑하고 부지런한 최술(崔述)이란 젊은 아전이 있었다.최술은 원래 가난한 상놈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하였다.범상치 않은 아들을 보고 비록 상놈의 자식이지만 천하게 기를 수 없다고생각한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엄하게 예의범절을 가르치고 글을 가르쳤다.이 덕분에 일반 상놈의 자식과 달리 사리에 밝고 학문에 조예도 깊었다.청년이 된 최술은 김판서댁에 머슴으로 들어갔고 다른 하인들과 달리천성이 부지런하고 매사에 성실했다. 평소 다른 하인과 달리 똑똑하고예의 바르고 어떤 일이라도 막힘없이 매끄럽게 처리를 하는 것이었다.이런 모습의 최술을 본 김판서는 최술에..

매형 내외에게 집에서 쫓겨난 득구

매형 내외에게 집에서 쫓겨난 득구부친 영정족자 들고 암자 찾아가는데큰 부자는 아니지만 먹고사는 데 아무 불편 없는 유 진사는 요즘 태산 같은 걱정이 생겼다.시집간 외동딸이 석녀라고 2년도 안돼 시집에서 쫓겨나 보따리를 싸들고 친정으로 돌아와제 방에 처박혀 한숨으로 나날을 보내는 것이다.허구한 날 얼굴에 수심이 잔뜩 덮인 딸을 보는 것은 유 진사의 가슴을 갈기갈기 찢는 일이었다.어느 날 백형의 장례를 치르느라 먼 길을 가 삼우제까지 지내고 열흘 만에 집으로 돌아와조심스레 딸의 동정을 살폈더니 딸이 먼저 사랑방으로 와 큰집 초상 치른 일을 물었다.얼굴이 훨씬 밝아졌다. 딸의 수심이 걷힌 기쁨이 백형의 저승행 슬픔을 지우고도 한참 남았다.중복이 가까운 어느 날 밤,마실 갔던 유 진사가 배탈이 나 일찍 집으로 ..

천방지축 맹랑과 닳고 닳은 과부 이모

천방지축 맹랑과 닳고 닳은 과부 이모“돈 한번 벌어보자” 쿵짝을 맞추는데 …창록이라는 이름이 버젓이 있건만 뭇사람은 그를 ‘맹랑’이라 불렀다.노는 게 맹랑했다. 하지가 지나자 온 세상이 낮이고 밤이고 후덥지근해졌다.열세살 맹랑이는 날도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이른 저녁 숟갈을 놓고개울가로 가 버드나무 위로 올라갔다.어둠살이 내리자 재잘재잘 동네 처녀들이랑 아지매들이 몰려왔다.맹랑이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훌훌 옷을 벗고 개울로 첨벙첨벙 들어갔다.그곳은 물줄기가 휘돌며 잠시 쉬어가는 곳이라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아낮에는 빨래터로, 동네 꼬맹이들이 퐁당퐁당 멱 감는 곳으로,밤이면 여인들이 땀 씻는 곳으로 명당이다.맹랑이 매미처럼 붙어 있는 버드나무 자리는 멱 감는 여인네들을 훔쳐보기가장 좋은 곳이다. 가까울 뿐..

천석꾼 노첨지, 소작료 거두러갔다

천석꾼 노첨지, 소작료 거두러갔다오서방 딸에 반해 논문서 건네는데천석꾼 부자 노 첨지가 불룩한 배를 뒤뚱거리며 집사를 앞세워소작료를 거두러 나갔다.소작농들은 없는 살림에 씨암탉을 잡거나너비아니를 굽거나 송이산적에 술상을 차려노 첨지를 맞았다. 소작료를 받으러 온 지주는 저승사자보다 무섭다.개울가 집 삽짝 밖에서 기다리던 오 서방 내외는코가 땅에 닿을 듯이 절을 하고노 첨지 팔짱을 끼고 집 안으로 모셨다.“이 논 일곱마지기는 가뭄에 물 걱정이 없어 농사가 잘됐네.”노 첨지의 이 한마디에 벌써 오 서방의 간이 쪼그라들었다.노 첨지가 마루에 앉자 오 서방 딸이 부엌에서 술상을 들고 왔다.노 첨지가 깜짝 놀랐다.천하일색에 허리띠로 졸라맨 치마가 탱탱한 엉덩이 선을 그대로 드러냈다.“술상을 들고 왔으면 한잔 따르..

열여덟살에 황포돛대 선주 된 오돌이

열여덟살에 황포돛대 선주 된 오돌이청어로 떼돈 번후 아버지 찾아 나서는데…함경북도 청진 바닷가 주막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오월이는 박박 얽은 곰보다.안방에서 주모와 함께 자는데 주모가 샛서방을 물어들이는 날은 빈방으로쫓겨나든가 마루에서 자야 한다.하루 일을 마치고 설거지를 하고 녹초가 되어 빈 객방에서 자는데취객이 들어와 집적거리는 게 귀찮아서 발로 밀치고 잤더니 이럴 수가!서너달이 지나니 헛구역질이 나는 것이다. 달이 차자 아들을 낳았다.주막에 들락날락거리는 땡추 노스님이 ‘오돌(吳乭)’이라 이름 지었다.오돌이는 고샅의 개똥처럼 이리 차이고 저리 구르며 한살 두살 먹더니여섯살이 되자 엿장수가 되었다.청진 바닷가에서 열살 아래 오돌이하고 맞짱 떠 코피 터지지 않은 아이가 없었다.열대여섯살 나는 저잣거리 ..

은율관아 앞 요릿집과 주막 차린 록지

은율관아 앞 요릿집과 주막 차린 록지사또가 찾아와 한가지 청을 하는데…‘뚜당뚜당’ 목수들이 서너달 땀을 흘리더니 은율관아 앞 개울 건너에 새집이 들어섰다.한울타리 속에서 뒤에는 아담한 기와집이 가운데 중문을 두고,앞에는 초가집이 들어서 사물패가 상모를 돌리고 꽹과리를 치더니 초가집은 주막이 되고기와집은 요릿집이 되었다.요릿집엔 사또와 은율 토호들이 출입하고 주막엔 은율관아의 육방관속과관군, 포졸, 장돌뱅이 나부랭이들이 들락거렸다.요릿집과 주막집 주인은 록지요, 자금 출처는 신랑 산적 두목이 주고 간 금덩어리 주머니였다.록지가 어느 날 은율장터에 나갔다가 길가에서 좌판 산나물을 한보자기 사서 계산하다가서로 깜짝 놀랐다. 어릴 적 이웃 친구 덕순이었다.록지와 덕순이는 두손을 마주잡고 팔짝팔짝 뛰다가 록지 집..

흉년에 어두운 민심 속 잠행 나온 숙종

흉년에 어두운 민심 속 잠행 나온 숙종웃음소리에 이끌려 골목을 오르는데…숙종은 땅거미가 내리면 허름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호위무사도 없이몰래 궁궐을 빠져나가 여기저기 쏘다니며 백성들이 살아가는 걸 두눈으로직접 보고 두귀로 직접 들었다.주막에 들러 대포 한잔 마시고 짠지 한점으로 입을 다시며 임금 욕하는 소리도 귀담아들었다.세상 민심이 흉흉했다. 설상가상 역병이 돌아 민심은 더더욱 어두웠다.작년 농사가 가뭄과 홍수로 예년에 없던 흉년이라 백성들의 보릿고개 넘어가는 신음소리가 애간장을 끓게 했다.이 골목 저 거리 발길 닿는 곳마다 한숨소리뿐이라 숙종의 마음이 천근만근인데 어디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저 소리 들어본 지 얼마만인가? 저 웃음소리!”숙종은 깜깜한 부암동 골목길을 비틀거리며 넘어지며 웃음소리 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