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나쁜 마음 품다 혀 잘린 젊은이

춘향골 2024. 7. 2. 11:52

나쁜 마음 품다 혀 잘린 젊은이
부친 세상 떠나고 외톨이 되는데



밤이 깊어 풀벌레 소리만 요란한데 허 의원댁 대문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을 깼다.
‘쾅쾅쾅’ 행랑채에서 자고 있던 사동이 눈을 비비며
“누구세요? 누구세요?” 고함을 쳐도
“어어어∼” 말도 못하며 대문만 쾅쾅 찼다.
사동이 대문을 열자 두손으로 피투성이가 된 입을 감싼 젊은이가
“어어어∼ 어버버∼” 벙어리 외침만 토했다.
사동이 보아하니 내일 아침에 다시 오라고 돌려보낼 처지가 아니다.

사동이 신발을 챙겨 신고 대문 밖으로 줄달음을 쳤다.
그날따라 허 의원은 첩 집에 간 것이다.
얼마나 기다렸나. 발을 동동 구르며 피를 쏟던 젊은이가 대문간에 주저앉아

웅크리고 있는데 허 의원이 동산만 한 배를 안고 뒤뚱거리며 사동을 따라왔다.
진찰실에 불을 켜고 응급환자를 봤더니 혀가 잘려 덜렁덜렁 한쪽에 매달려 있었다.
소금물로 피를 씻어내고 아파서 죽겠다는 놈을 형틀에 묶어놓고
바늘에 명주실을 꿰어 혀를 꿰맸다.
“어쩌다가 혀가 잘렸어?” 허 의원이 큰소리로 물어봐야 허사인 것이
혀를 굴리지도 못할 뿐더러 너무 아파 기절까지 했다.

희끄무레하게 동녘이 밝아올 때쯤에야 사동이 찬물을 퍼부어

혀가 잘린 젊은이가 정신을 차렸다. 박 진사의 개차반 외동아들 박한이었다.
지난밤 저잣거리에서 친구들과 술을 잔뜩 마시고 비틀거리며 집으로 가던 박한은
마을 초입 장 초시네 집 방에 불이 켜져 있어 까치발로 들창을 들여다봤다.
셋째딸 이매가 바느질을 하다가 불을 켠 채 쓰러져 자고 있었다.
저고리는 벗어 젖무덤이 거의 다 나왔고 속치마만 입어 희멀건 허벅지도
그대로 드러났다.
박한은 정신이 혼미해져 가쁜 숨을 쉬면서 장 초시네 담을 넘었다.
방문을 살짝 열고 들어가 호롱불을 끄고 이매의 입에 혀를 넣었다.
“으∼아악!” 그대로 피투성이가 돼 허 의원댁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박 진사가 돈 보따리를 싸 들고 허 의원을 찾아와 아들이 말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읍소를 했다. 허 의원이 매일 왕진을 했지만 장마철에 덜렁거리던 혀는
제대로 접합이 되지 않고 시커멓게 썩기 시작하더니 결국 떨어져나갔다.
삼대독자 아들이 말을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된 연유야 입 밖에 내기도 창피한 가문의 수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말을 못하게 만들다니!
박 진사는 삼대독자를 빨리 장가보내 대를 이어야 하는데 벙어리한테

시집올 처녀가 없는 것이다.
화병이 난 박 진사는 술독에 빠져 살다가 병석에 눕게 됐다.
백약이 무효. 박 진사는 일어날 줄 모르고 문전옥답은 한마지기,
두마지기 약값으로 팔려나갔다.
박한은 낯을 들고 바깥출입을 할 수 없어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었다.
문전옥답 다 팔고 나서 박 진사는 이승을 하직했다.

사십구재 후 부랴부랴 탈상을 하고 나서 박한은 심마니 당숙을 따라 산속을 헤맸다.
밀린 약값으로 집도 날아가자 박한은 산속에 귀틀집을 짓고 너와로 지붕을 이었다.
약초를 찾고 가끔씩 산삼도 캐서 저잣거리로 나가 필담으로 약재상과 흥정했다.
아는 사람 만날까봐 고개를 숙이고 삿갓을 눌러쓴 채 국밥집에 들어가
떡이 되도록 술을 마시곤 했다.

칠흑 같은 밤, 숲길을 걸어올라 제집에 들어가 벽에 기대어 앉으면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대가 끊어지는 걸 그렇게도 애통해하던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에 박한은
방구석에 머리를 처박고 짐승처럼 울음을 짜냈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쏴∼ 푸른 달빛이 쏟아져 들어오며
여자의 흐느낌 소리도 달빛에 묻혀 함께 들어왔다.
누군가 들어와 문을 닫아 달빛을 막고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박한을 뒤에서 껴안았다.
“어버버!?” 모골이 송연해진 박한이 돌아앉았다.
“소첩, 이매이옵니다”
“어버버버∼” 박한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겁탈하려다 혀가 잘려나간 박한도 얼굴을 들고 바깥출입을 못했지만

이매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고함을 쳐서 쫓아내기만 할 걸 삼대독자를
벙어리로 만든 회한과 죄책감·수치심으로 두문불출하다
어느 날 산속으로 들어가 폭포가 만든 소(沼)에 몸을 던졌다.
그때 지나가던 탁발승이 이매를 건져내 암자로 데려가 이매는
부엌일을 하는 공양보살이 됐다.
폭포 주변에 벗어놓은 신발이 발견돼 이매는 자살한 걸로 소문이 났다.
장 초시는 만취한 후 피울음을 삼키고는 딸의 시신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았다.
몇달 지나지 않아 이매는 망각 속에 묻혀버렸다.

이매는 첩첩산중 외딴 암자에서 공양보살을 하며 박한에 대한
소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박한은 벙어리였지만 이매는 박한의 입 모양을 보고 말을 알아들었다.
삼년이 지난 어느 봄날 한식에 박 진사 묘소 앞에 술잔을 올리고 넷이서 절을 했다.
박한과 이매 그리고 어린 두 아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