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어머니와 국숫집 하는 함박이

춘향골 2024. 7. 26. 12:46

어머니와 국숫집 하는 함박이

한 사내에게 칼 한자루 사는데…

만추의 밤비는 을씨년스럽다.

흐트러진 낙엽을 때리는 굵은 빗줄기는 ‘투두두둑’ 콩 타작하는 소리를 냈다.

국숫집 함박이는 호박죽을 끓이다 말고 시시때때로 들창을 열고 빗줄기를 가늠했다.

초상집에 가신 엄니가 언제 오시려나 걱정하고 있는데 대청마루에 걸어둔

초롱불이 꺼지고 소리 없이 부엌문이 열렸다.

“엄니” 함박이가 고개를 돌렸다. 문을 꽉 채운 시커먼 물체,

그리고 가느다란 불빛을 모두 빨아들이며 번쩍이는 칼.

“누구세요? 칼 장수예요?” 대답이 없다.

“비를 맞았군요. 여기 아궁이 앞에 앉으세요.”
함박이가 조용히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 남자의 손에서 칼을 받아 쥐고

도마 위 파를 썰었다.

“너무 좋네요. 손잡이가 내 손에 꼭 맞고 칼날도 마음에 쏙 드네요.

안 그래도 내일 장날에 저잣거리 장터에 가서 칼을 사려고 했는데.”

함박이가 국자로 호박죽 한그릇을 퍼서 총각 강도에게 건네며 말했다.

“추운데 뜨거운 호박죽 한그릇 들어보세요.”

아궁이 앞에 앉은 강도가 입천장이 델 듯 ‘후루룩’ 호박죽을 단숨에

마셔버리고 나서 입을 열었다.

“그 칼이 정말 맘에 드세요?” 함박이가 기다렸다는 듯이

“네, 얼마 드리면 될까요?” 하고 되물었다.
“맘에 들면 그냥 쓰세요. 휴∼” 총각 강도의 한숨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아니에요. 칼은 절대로 그냥 받는 법이 없어요!”

함박이는 속치마 주머니에서 엽전을 한줌 꺼내 총각 강도의 손을 펼쳐

살포시 쥐어줬다. 총각 강도는 부엌문을 열고 밤비 속으로 사라졌다.


칼국숫집 외동딸 함박이가 강도를 보내놓고 아궁이 앞에 털썩 주저앉아

냉수 한사발을 벌컥벌컥 들이켜며 ‘쿵쿵’ 뛰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튿날, 강도에게서 산 칼로 국수를 썰던 함박이 어미가

“칼이 참 좋구나. 못 보던 칼인데?” 하자 함박이는 얼버무리며

지난밤 일을 털어놓지 않았다. 국숫집 모녀는 쓸수록 칼이 좋다는 걸 알았다.

칼이 초지장도 쓱쓱 감쪽같이 잘라내고 아무리 질긴 재료도

도마 위에만 올라가면 쓱쓱 거짓말처럼 잘렸다.


두어달 지난 어느 장날 점심나절 정신없이 손님들을 치른 후 함박 어미는

장 보러 나가고 함박이가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허우대가 멀쩡한 총각이

문밖에서 두리번거리다가 국숫집으로 들어왔다. 함박이의 가슴이 철렁했다.

바로 밤비 오던 날, 그 총각 강도였다.
“그 칼 써보니 어떻습디까?” 그는 수줍게 물었다

“너무 좋아요.” 함박이가 환하게 웃자 그는

“알아주시는군요. 정말 좋은 칼입니다. 사철로 만든 접쇠칼로 녹이

슬지 않고 칼자루는 버드나무 뿌리여서 썩지 않습니다” 하고 말했다.

강도 총각은 노끈 망태에서 숫돌을 꺼내더니

“그 칼 주세요. 칼날을 갈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했다.

칼을 받아 든 그 총각이 손바닥으로 칼날을 긁어보더니 낮게 말했다.

“조금도 무뎌지지 않았군요.” 그는 확신에 찬 얼굴로 숫돌을 망태에 넣고

가죽 띠를 꺼내 팽팽하게 펼친 뒤 칼날을 몇번 쓰다듬었다.

함박이가 얼른 국수 한그릇을 말았지만 그는 바람처럼 사라졌다.


총각 강도 주철이는 어릴 때부터 쇠붙이를 끔찍하게 좋아했다.

대장간에서 시뻘건 화덕 위의 뻘겋게 단 쇳덩어리를 망치질해 호미와 쟁기를

만드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느라 끼니를 거른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서당에는 가지 않고 집 짓는 곳이나 공사판에 기웃거리며 버려진 못 동가리나

쇠붙이를 주워 와 집에서 쇠죽 아궁이에 달궈 칼을 만들었다.

주철이는 팔 힘이 오를 때 새경을 받고 대장간에서 일하다가 열여덟살 때

산 넘어 외딴 강가에 움막집을 지어 대장간을 차렸다.
엿장수한테 사들이고 고철상에서 사들인 쇠가 맘에 들지 않아

용광로를 만들어 모래를 제련해 철을 뽑았다.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뽑아낸 사철(沙鐵)!

주철이는 사철괴를 품에 안고 대성통곡했다.

그는 사철을 두드려 형태를 잡는 단조공법을 쓰지 않고 얇게 판을 만들어

접고 또 접는 접쇠법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칼을 만들었다.

펄 속에 잠긴 버드나무 뿌리로 칼자루를 만든 뒤 그는 두팔을 벌려

만세를 불렀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집이 담보 잡히고 논밭도 남의 손에 넘어가 어미가 잔칫집 품팔이로 나가자

가을비 내리던 그날 밤,

대낮부터 술을 마시고 강도짓을 한 후 이튿날 산 넘어 강가의 대장간을

불 질러 없애려 했는데 국숫집 처녀의 함박웃음이 그를 잡았다.
명품 칼의 입소문은 국숫집에서 퍼져나갔다.

삼년이 지났다.

함박표 칼은 한양에서도 명성을 떨쳐 주문이 반년치가 밀렸다.

주철이와 함박이 사이엔 아들딸이 생겼고 주철이 대장간엔

대장장이들이 스물넷, 망치질 소리가 끊길 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