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담, 야설, 고전

천방지축 맹랑과 닳고 닳은 과부 이모

춘향골 2024. 6. 30. 12:29

천방지축 맹랑과 닳고 닳은 과부 이모

“돈 한번 벌어보자” 쿵짝을 맞추는데 …

창록이라는 이름이 버젓이 있건만 뭇사람은 그를 ‘맹랑’이라 불렀다.

노는 게 맹랑했다. 하지가 지나자 온 세상이 낮이고 밤이고 후덥지근해졌다.

열세살 맹랑이는 날도 어두워지지 않았는데 이른 저녁 숟갈을 놓고

개울가로 가 버드나무 위로 올라갔다.

어둠살이 내리자 재잘재잘 동네 처녀들이랑 아지매들이 몰려왔다.

맹랑이는 사방을 두리번거리더니 훌훌 옷을 벗고 개울로 첨벙첨벙 들어갔다.
그곳은 물줄기가 휘돌며 잠시 쉬어가는 곳이라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아

낮에는 빨래터로, 동네 꼬맹이들이 퐁당퐁당 멱 감는 곳으로,

밤이면 여인들이 땀 씻는 곳으로 명당이다.

맹랑이 매미처럼 붙어 있는 버드나무 자리는 멱 감는 여인네들을 훔쳐보기

가장 좋은 곳이다. 가까울 뿐 아니라 몸을 숨길 수 있는 유일한 자리다.

요 맹랑한 놈은 제가 실컷 훔쳐보고는 서당의 머리 굵은 대봉이한테

삼전을 받고 자리를 팔았다.

 

맹랑이는 버드나무 한자리를 팔아서는 성이 차지 않았다.

맹랑이네선 어머니는 허구한 날 병석에 누워 있고 배다른 과부 이모가

살림을 맡아서 하고 있었다. 이모는 매일 밤 뒤꼍 우물가에서 물을 뒤집어썼다.
맹랑이 서당 학동들을 모았다.

이모가 부엌에서 호롱불빛 아래 설거지를 할 때면 맹랑이는 학동들을

우물가 토란밭에 숨겼다. 가까운 곳은 이전씩, 뒷자리는 일전씩 받았다.

허구한 날 모은 돈으로 장터에 가서 주전부리하며 사업을 잘 굴려갔는데

엉뚱한 일로 사달이 났다. 이모가 한창 물을 뒤집어쓰고 있는데

누군가 ‘에취∼’ 하며 재채기를 한 것이다.

우르르 도망치는 놈들 중에 이모가 벌거벗은 채 한놈을 낚아챘다.

모든 걸 실토하고 말았다.

이모가 돌아와 오른쪽 귀싸대기를 얼마나 세게 후려쳤는지

맹랑이 오른쪽 고막이 터지고 말았다.

“너 언제부터 이 사업을 했고 얼마를 벌었어?”

맹랑이가 쓰다 남은 삼십육전을 몽땅 이모에게 건네줬다.

 

어느 날 맹랑이 이모한테 말했다.
“이모, 내가 장터에서 엿장수도 해보고 겨울밤에 찹쌀떡 장수도 해봤지만

이것만큼 쉽고 이문이 많은 사업은 없어요.”

이모도 지난 장날 돈을 다 쓴 터라 피식 웃으며 무언의 승낙을 했다.

이번에는 서당에서 모객을 하지 않고 동네 머슴들을 모았다.

관람료도 삼전으로 올렸다.
어둠살이 내리자 머슴들이 슬슬 담을 넘어와 맹랑이 지시에 따라

토란밭에 숨어들었다. 이모는 짐짓 모른 척 부엌에서 설거지를 해놓고

뒤꼍 우물가로 와서 천천히 옷을 벗기 시작했다.

적막강산 토란밭 속에서 머슴들 침 삼키는 소리를 뒷산 소쩍새 소리가 삼켜버렸다.

이모가 몇번 물을 퍼붓고 집으로 들어가자 머슴들도 토란밭에서 나와

뒷담을 넘어 흩어졌다.


이모 방에서 언쟁이 붙었다.

수익금을 반반 나누는 건 불공평하다고 강하게 이의를 제기한 것은 이모였다.

티격태격하다가 이모가 육할, 맹랑이 사할로 합의했다.

산전수전 다 겪은 이모는 또 희한한 생각을 해냈다.

오줌발이 바위도 뚫는다는 혈기방장(血氣方壯)한 머슴들의 양기를 머금고 자란 토란!

이모는 그걸 캐서 부잣집 안방마님들에게 비싸게 팔았다.

마님들은 양기가 응축된 토란으로 국을 끓여 축 처진 남편들에게 먹였다.
삼복이 지나고 아침저녁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백로를 넘기자

맹랑이와 이모의 사업은 끝났는가? 아니다. 장소를 옮겼을 뿐이다.


부엌에서 가마솥에 물을 데워 이모가 목욕을 하면 엉성한 부엌 문틈으로

머슴들이 들여다보고 맹랑이한테 사전씩 바쳤다.
오 첨지 집에서 상머슴으로 한해 동안 일하고 새경을 넉넉하게 받은 박대근이가

맹랑이를 불러 깨엿을 주더니 귓속말로 희한한 제안을 했다.

이모한테 얘기했더니 빙긋이 웃을 뿐 싫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어둠살이 내려 풀벌레 소리만 요란한 초가을 밤에 맹랑이가 이모를 데리고

물레방앗간으로 가자 박대근이가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고 있었다.

집으로 가는 척하다가 발길을 돌려 물레방앗간으로 갔더니 물소리가

어지간한 소리는 다 삼키는데도 이모의 죽겠다는 신음 소리는 방앗간을 박차고 나와

맹랑이 다리를 풀리게 했다.

이제 이모와 대근이가 직거래를 하니 맹랑이는 중간에서 붕 떠버렸다.
툇마루 기둥에 기대어 졸고 있던 이모가 맹랑이 발자국 소리에 눈을 떴다.

“이모, 나는 빈손이야?” 이모가 대답은 없이 눈을 흘겼다.
“이모가 외할머니 죽고 나서 들어왔으니 이모하고 나하고는 사실 남남이네 뭐.”

그러다 맹랑이가 맹랑하게 운을 뗐다.
“이모, 에∼ 소개비 대신, 에∼”

‘철썩’ 이모의 솥뚜껑 왼손이 맹랑이의 왼뺨을 후려쳤다. 왼쪽 고막마저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