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그시절

<1975> 바보들의 행진

춘향골 2023. 9. 17. 12:35

1975년 제작

최인호 원작. 하길종 감독. 윤문섭 이영옥 하재영 주연







바보들의 행진

최용현(수필가)
 
   영화감독 하길종미남배우 하명중의 친형이다여덟 살에 어머니를 잃고열 살엔 아버지마저 잃는다서울대 불문과에 입학하자마자 3.15부정선거로 인한 4.19혁명에 가담하여 승리의 희열을 맛본다그러나 이듬해 터진 5.16쿠데타로 다시 절망에 빠진다졸업과 동시에 신 필름에 입사하며 영화감독의 꿈을 키우지만그의 일은 잡일과 심부름이었다.


   1965그는 신 필름에 사직서를 내고 미국 유학길에 오른다돈을 벌기 위해 접시도 닦고주유소에서 기름도 넣고시체 닦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마침내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LA) 영화과 석사과정에 입학한다. ‘대부’ ‘지옥의 묵시록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그의 동기였고후배 중엔 스타워즈’ 시리즈의 조지 루커스도 있었다.


   그의 졸업 작품 병사의 제전’(1969)은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군인이 관을 끌고 해변을 거닐고벌거벗은 남녀가 전몰장병묘지를 뛰어다니고인디언 무당이 굿판을 벌이는 등 파격적인 내용인데이 영화로 그는 MGM영화사에서 미국의 영화학도 4명에게 주는 메이어그랜드 상을 수상했고 강사직도 제안 받는다.


   그러나 하길종은 자신의 학생운동 전력과 병역미필 때문에 공직자인 형이 승진에 실패하고 낙마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을 택한다장발에 긴 가죽 부츠를 신고 온 그는 공항에서 정보부 요원에게 압송되어 조사를 받는다학부시절의 동료들은 대부분 반정부 행위로 감옥에 있거나 수배 중이었다그는 긴 머리를 자르고 늦깎이로 입대한다.


   군복무를 마친 하길종은 이효석의 소설을 각색한 화분’(1972)으로 감독에 데뷔한다그러나 권력자를 비꼬는 내용에다 표절논란까지 더해져 흥행에 참패하고 호된 충무로 신고식을 치른다다시 삼국시대를 배경으로 한 무협사극 수절’(1974)을 만들지만칼자루를 쥔 정부에 의해 20여분 분량이 잘려나갔고 관객으로부터도 외면을 받는다.

   두 번의 참담한 실패를 맛본 하길종 감독이 세 번째로 선택한 작품이 바로 대학생을 다룬 청춘영화 바보들의 행진이다서구문명의 영향을 받고 자란 당시 젊은이들의 불투명한 미래와 사랑그리고 방황을 그린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1975년 5월말에 개봉하여 서울관객 15만 명 돌파라는 대성공을 거두며 그해 최고의 흥행작으로 기록된다.

   이 영화에는 1960년대 4.19와 5.16을 겪은 하길종 감독이 1970년대 소위 유신시대를 살아가는 후배들을 향한 따스하고 유쾌하면서도 우울한 시선이 담겨있다미풍양속을 해친다는 명목으로 장발단속을 하고통행금지라는 굴레를 씌워 밤 12시가 넘으면 돌아다니지 못하게 했지만그 속에서도 청바지와 생맥주통기타로 대표되는 청년문화는 꽃을 피웠다.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인권침해가 일상처럼 행해지던 그 시절의 대학생들은 영화에서처럼 단체미팅을 하거나 막걸리마시기 대회를 열면서 좌절감을 달랬다감독의 눈이라고 할 수 있는 카메라는 그 시절의 대학생 영철(하재영 )과 병태(윤문섭 )의 발길을 따라가면서 그들이 처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한 번도 자신의 실력으로 합격을 하지 못했다는 열등감을 가진 부잣집 외아들 영철은 군 입대 신체검사에서도 탈락한데다 미팅에서 만난 여친 순자(김영숙 )마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절망에 빠진다스스로를 쪼다라고 생각한 영철은 고래를 찾는다며 혼자 자전거를 타고 동해로 떠난다그리고 가파른 절벽에서 동해바다로 뛰어내리고 만다.

   철학도인 병태는 미팅에서 만나 친하게 지낸 여친 영자(이영옥 )가 철학과는 장래에 대한 비전이 없다며 절교를 선언하자 긴 머리를 빡빡 밀고 입영열차에 오른다그때 영자가 달려와 애타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고병태는 열차 창문에 매달리는 영자와 입을 맞춘다이 마지막 장면은 한국영화사에 명장면으로 남는다.

   주제곡 날이 갈수록의 선율이 잔잔하게 깔리고 송창식의 애잔하면서도 호소력 짙은 육성으로도 나온다이 곡은 요절한 가수 김정호가 리메이크해서 크게 히트했다또 영화의 삽입곡인 송창식의 왜 불러와 고래사냥은 시위학생들이 자주 부르는 바람에 금지곡이 되고 말았다고래사냥의 가사를 보자.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오~
 
   ‘바보들의 행진의 시나리오는 4차례에 걸친 사전검열로 만신창이가 되었고완성된 필름도 여러 군데 칼질을 당해 어떤 장면은 전혀 엉뚱하게 연결되기도 했단다예컨대 야구경기에 응원 간다고 학생들이 단체로 강의실을 나가는 모습은 본래 데모에 참가하기 위해 빠져나가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하길종 감독은 심의를 통과한 직후잘린 필름을 다시 이어 붙여서 국도극장에서 상영을 하다가 당국이 파견한 요원들에 의해 남산에 끌려가기도 했다우여곡절 끝에 117분으로 완성된 바보들의 행진은 결국 러닝 타임 102분짜리 영화가 되었고이때 잘려나간 15분은 영영 복원할 수 없게 되었다.

   이 영화에는 이미 고인이 된 반가운 얼굴들이 보인다원작소설을 쓴 당대의 인기작가 최인호의 젊은 시절 모습도 나오고당시의 인기 코미디언 땅딸이 이기동왕년의 명우 최남현과 문오장의 모습도 보인다또 고교얄개로 유명한 이승현이 어린 신문팔이소년으로 나오기도 한다.

   이후 하길종 감독은 속 별들의 고향’(1978)과 바보들의 행진의 속편인 병태와 영자’(1979)를 잇달아 히트시킨다그러나 시대와 불화했던 이 천재감독은 유신정권이 종식되던 그 해 병태와 영자가 연일 만원사례를 거듭하던 2월 마지막 날충무로의 어느 술집에서 뇌졸중으로 쓰러져 다시 일어서지 못한다그의 나이 39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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